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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부는 마운드에 오르기 전 홈플레이트에서 공을 굴려본다. 1루쪽과 마운드로, 그리고 3루쪽으로. 그라운드가 제대로 고른 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황당한 구심은 장명부에게 빨리 마운드로 올라가라고 지시한다.
천천히 마운드에 올라간 장명부는 OB 베어스의 덕아웃을 바라보며 특유의 능글맞고 냉소적인 웃음을 던진다.
1983년 4월 12일 대전구장. 그 전 해 우승팀 OB 선수들은 처음 상대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우완 괴물 투수 장명부를 호기심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주시한다.
장명부가 일본에서 알아주는 투수 기록을 올렸지만 나이도 33살로 많고 팔꿈치도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 와서는 1승1패를 기록하고 OB와는 시즌 처음으로 대결하는 경기였다. OB는 82년에 삼미를 상대로 16전 전승의 완승을 거둔 경력이 있어 자신만만했다.
원년 챔피언답게 OB는 장명부를 처음부터 두들겼다. 삼미도 장명부가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겠다는데 힘입어 9회까지 5-5 동점을 이룬다. 연장 13회초 1사 2, 3루에서 삼미는 야수선택으로 결승점을 올린다. 계속된 1사만루에서 김진우가 구원투수 장호연을 상대로 중전적시타를 때리고 이 타구를 중견수 박종훈이 알을 까자 싹쓸이 하는 등 6점을 한꺼번에 뽑아 11-5로 승리한다.
전년도 꼴찌가 챔피언을 1년여만에 처음으로 이기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장명부는 13회를 완투하며 무려 16안타를 얻어맞고 사사구 6개, 탈삼진 6개를 기록하면서 승리투수가 된 것이다.
1969년에 일본 최고 명문 요미우리에 입단한 장명부는 73년 난카이로 옮겨 팀의 퍼시픽리그 우승에 기여하고 77년에는 히로시마로 이적해 그 해 15승6패를 올리며 팀이 일본시리즈를 제패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허나 82년에 어깨 부상으로 3승11패에 머물고 일본인들의 차별대우에 소외감을 느끼다 은퇴를 선언했다.
프로 원년 최하위에 머문 삼미가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내 설득에 나서고 장훈의 모국행 권유에 일본프로선수 출신으로 처음으로 한국에서 뛰게 됐다. 하지만 귀국하기 직전 삼성의 일본 전지훈련지를 찾아가 배팅볼을 던져주며 “나는 아직 삼미와 계약을 맺지 않았다”고 말해 삼미측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83년 2월 그는 인천구장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필자가 그에게 “삼미와 계약을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저의가 무어냐”고 묻자 그는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필자가 일본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사람이 있다고 조목조목 따지자 그는 덕아웃 의자에 앉아 있다가 금세 바닥으로 내려 앉으며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 사과합니다”고 말하며 삼미 관계자들에게도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그라운드에 나가 공을 던지는 대신 배트를 힘차게 3분간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보는 사람 모두가 헷갈렸고 누구는 ‘일본 프로는 다르다”고 짙은 호기심을 나타냈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1억 3000만 원에 계약하고 집 마련 등 부대 비용 5000만원의 혜택을 받고 다음 날 공식 기자회견에서 장명부는 “20승 정도는 기본이고 30승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호헌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차장과 허형 삼미 구단 사장은 박철순이 전년도에 24승은 올렸으나 30승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장명부는 “정말 30승을 하면 어떻게 할거냐”고 따졌고 허형 사장이 농담삼아 “1억 원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무심코 이야기했다.
스리쿼터형에 가끔은 사이드암으로 던지며 다양한 변화구와 몸쪽을 찌르는 승부구가 장기인 장명부는 챔피언 OB를 이기고는 승승장구했다. 인천구장은 만원사례가 이어졌고 어떤 팬은 그의 별명과 같은 <너구리 라면>을 잔뜩 사서 선물하기도 했다.
‘한물 간 투수’라는 의구심을 떨치고 그는 무쇠팔을 자랑하며 완봉승 다음 날에도 다시 등판했다. 구원, 마무리를 가리지 않은 그는 어떤 때는 중간에 나왔다가 동점을 내주고 구원승을 따내 “일부러 30승을 위해 승수를 올리려 그런 쇼를 한 게 아닌가”라는 의혹도 불러 일으켰다.
최고의 교타자 장효조를 상대로 15타수 1안타만 내주는 호투를 하던 장명부는 6월 1일 MBC와 경기에서 소속팀 김진영 감독이 심판장 폭행 사건을 일으켜 구속되고 6월 7~9일 광주 3연전에서 팀이 해태에 3연패를 당하면서 전기리그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팀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으나 장명부는 기적의 30승을 기록했다. 팀의 전체 게임(100경기)에 절반도 넘는 60게임에 등판해 36게임을 완투하며 30승16패6세이브, 방어율 2.34라는 철완을 과시한 것이다.
한 시즌 30승은 1969년 이후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에서도 나오지 않은 대기록이며 우리 프로에서는 이제까지 84년의 최동원(롯데)이 세운 27승이 두 번째 최다승 기록이다.
시즌 종료 후 장명부는 허형 사장에게 보너스 1억 원을 요구했으나 정식 문서에 의한 옵션이 아니어서 구단이 뒤로 빼자 그는 크게 반발했고 난처해진 허 사장은 개인돈 기천만 원을 주는 것으로 겨우 달랬다.
이후 계약 때마다 구단과 마찰을 빚은 장명부는 엄청나게 많은 연봉을 챙겼으나 히로시마 시절 후원회 멤버들이 한국에 오면 저녁 값 한번에 수백만 원을 쓰는 등 씀씀이가 헤퍼 재산을 모으지는 못했다.
그는 86년 신생팀 빙그레로 옯겼다가 그 해를 끝으로 은퇴하고 삼성과 롯데에서 코치 생활도 했으나 91년 5월 22일 각성제 복용 혐의로 성낙수와 함께 구속됐다가 일본으로 추방됐다.
일본에서 택시 운전 등을 하던 그는 소식이 끊어져 지난 해 SK 와이번스는 인천 문학구장 개장을 기념해 추억의 인물로 그를 초빙하려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행사가 불발됐다.
 
chunip@poctannews.com
[사진]1983년 베스트10에 뽑힌 재일동포 장명부(오른쪽)와 김무종(당시 해태 포수)이 나란히 서서 감개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KBO 한국프로야구 20년사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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