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경북고와 대구상고를 앞세운 고교야구의 경북시대를 배경으로 프로야구 개막을 맞이한 덕분이겠지만, '천재'라고 불릴 만한 선수들을 가장 많이 가졌던 팀이라면 단연 삼성 라이온즈가 될 것이다.
 
김시진과 이만수로부터 유중일, 그리고 다시 양준혁과 이승엽까지. 그러나 그런 풍족함은 불가피하게 다른 한 끝에 채 만개하지 못한 안타까운 천재들의 이름 또한 길게 늘어서게 하기도 했다. 강기웅·박충식·동봉철, 혹은 최익성과 강동우.
 
그 중에서도 동봉철이라는 선수가 우리 기억 속에서 지니는 의미는 독특하다. '제법이다' 싶었던 첫 두 해를 거쳐 평범함에도 미치지 못했던 여섯 해 동안 네 번이나 유니폼을 갈아입는 고행 끝에 사라져간 이름이지만, 그래서 '이적횟수'를 제외하면 드러날 만한 통산기록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한 시즌이라도 기억할 만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닌 그이건만, 92년과 93년의 프로야구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그 이름에서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존재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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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저니맨 journey man)'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수식어를 찾아보자면, '역대 최고의 2번타자' 정도가 될 듯싶다. 역동적인 에너지로 팀 타선에, 그리고 경기자체에 활력을 불어넣던 묘한 마력의 타자. 그래서 '2번'이라는 타순을 재발견하게 했던 타자.
 
순서대로 타석에 들어서는 아홉 명의 타자들 중에서 1번부터 5번까지 다섯 명을 상위타선, 6번부터 9번까지 네 명을 하위타선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상위타선 중에서도 다시 1·2번을 '테이블세터'라고 부르고, 3·4·5번을 '클린업 트리오'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1·2번의 임무는 주자로서 누상을 채워 상을 차려놓는 것이고 3·4·5번은 그것을 말끔히 쓸어담아 점수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각기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서로의 영역으로 녹아들며 경기를 만들어나가느냐를 보는 것이 또한 야구의 재미가 된다. 그래서 김재박과 전준호 그리고 이종범 등이 각축을 벌일 '역대 최고의 1번 타자'와 장종훈·이승엽·김동주 등의 이름이 늘어설 '최고의 4번타자'를 꼽는 일은 서로 다른 세대에서, 서로 다른 팀을 주목했던 야구팬들에게 끝나지 않을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최고의 3번과 5번을 가리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최고의 2번타자'를 논제로 꺼낸다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출루와 주루'를 미덕으로 하는 1번 타자와 '결정력과 파괴력'으로 비교될 4번 타자에 비해 2번의 존재감은 흐리고도 애매하다. 그래서 굳이 2번이 가져야 할 미덕은 '작전수행능력'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출루한 1번을 진루시켜 득점권에 보냄으로써 기회를 3·4번으로 이어주는 것'이 곧 그의 임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2번에게는 '희생' 번트를 비롯한 작전이 많이 내려지게 되고, 그만큼 안타나 도루나 홈런, 혹은 출루율 같은 개인적 업적마저 대개는 '희생'당해야 하는 위치가 되며, 격렬하고 단순한 것에 열광하는 군중들의 기대를 정면에서 배신해야 하는 것이 그 본분이기에 '인기' 또한 희생해야 하는 것이 2번임도 물론이다.
 
2번타자들 스스로는 '작전수행능력'이라는 말 대신, '희생정신'을 미덕으로 꼽는 것이 그런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2번'이란 상위타선 속의 하위타선이며, 야구경기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가장 재미없는 요소를 만들어내는 존재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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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과 93년의 삼성 라이온즈는 비록 최강의 팀은 아니었지만, 가장 역동적인 야구를 보여주는 팀이었고 전통적인 팬이 아니더라도 끌어당길 수 있는 매력을 가진 팀이었다.
 
비록 투수력에서의 한 치 모자람이 우승과 거리를 멀게 했지만, 유중일과 강기웅의 키스톤콤비를 축으로 한 꼼꼼하고도 화려한 수비가 일품이었고, 공격 면에서도 톱타자 유중일의 끈질긴 승부로부터 김성래와 양준혁, 혹은 이종두의 힘과 강기웅의 기교가 좌우로 두루 갖춰진 중심타선이 어느 순간이든 기대를 접지 않을 수 있는 경기를 만들어내곤 했다.
 
그러나 그 두 해, 2번 타순에서 활약했던 동봉철의 존재를 빼놓고 라이온즈 타선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로 첫해였던 92년, 동봉철은 전경기에 출장해 130개의 안타를 쳐내면서 .317의 타율에 85개의 사사구를 얻어내며 전체 5위에 해당하는 .433의 출루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24개의 도루를 뽑아냈고, 동시에 11개의 홈런과 4할대 후반의 장타율을 기록했다. 여느 톱타자에 못지 않은 기동성과 여느 클린업트리오에 못지않은 파괴력을 갖춘 2번 타자의 탄생이었다.
 
그는 '빠른 발과 타격능력을 두루 갖춘 왼손잡이 타자'였고, 동시에 '희생정신'과 '야구센스'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희생번트 대신 강공을 지시한다 해도 타구는 항상 주자의 뒤쪽으로 향했고, 그 해 번트보다는 강공으로 재미를 본 그였지만 병살타는 단 5개뿐이었다.
 
흔히 감독들에게 희생번트의 선택은 단순한 '차선'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수십 명으로 팀을 이루어 기세를 모으고 벼려 아홉 번 공격과 수비를 겨루는 경기에서 기회의 상실은 곧 위기의 초래를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무사 1루의 기회에서 혹시라도 병살타가 터져 나와 순식간에 투아웃으로 정리되는 순간, 타점기회를 노리던 다음타자의 방망이에서 집중력이 빠져나가버릴 것이고, 더그아웃 한 구석에서 숨죽이며 지켜보던 투수도 어깨가 허전해질 것이다. 반면 바로 다음 회 그들이 마주할 상대는 위기를 이겨낸 희열로 한층 거세게 부딪혀올 것이고, 바로 그 순간을 견뎌내지 못하면 대량실점의 참패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들은 흔히 아웃카운트 하나를 버리는 대신 주자를 2루에 옮겨놓고, 이어지는 팀의 대표적 강타자들인 3·4·5번 중 하나가 타점을 올려주기를 기다려보는 것이다. 그것은 운의 도움 없이 사람의 힘으로 기대해볼 수 있는 가장 확률 높은 득점 방법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 하나도 긴장을 놓지 않아야만 최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팀 경기'의 속성상 선수들이 허탈하게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회를 이어가는 데 부족함이 없는 데다 1번의 공격이 무위로 끝난다면 스스로 출루해서 도루를 성공시킴으로써 공백을 메워내는 타자, 그리고 이따금 경기의 흐름이 요구할 때면 풀스윙으로 담장을 넘겨대기까지 하는 타자가 바로 동봉철이었던 것이다. 감독은 동봉철이라는 2번타자 덕분에 배짱 있게 적극적인 공격작전을 구사할 수 있었고, 아직 기억에 생생한 사자군단의 그 한 순간도 구김살 없던 호쾌한 방망이질이 가능했던 것이다.
 
93년에 그는 방위병이었다. 군인의 지방이동은 규제되었지만 경기출장은 허용되었던 그 때, 동봉철은 퇴근 후 저녁시간을 이용해 홈경기에만 출장할 수 있었다. 그 해 그는 출장한 68경기에서 무려 20개의 도루를 기록했으며 .345라는 높은 타율과 44개의 사사구를 얻어내 대구를 열광시켰다. 그가 나선 경기에서는 '쉬어가는' 흐름이 없었고, 사람들은 이미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는 단어의 저작권이 이글스 팬들에게 넘어가버렸다는 사실을 한탄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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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94년과 95년, 생각지 못했던 관절계통의 통증에 시달리며 주춤하기 시작한 동봉철을 꾸준히 기다려줄 만큼 라이온즈는 궁한 팀이 아니었다. 94년에 이동수와 최익성, 그리고 김한수가 들어왔고 95년에는 이승엽이 등장했다. '전설' 이만수마저 9회 마지막 공격에서 팬들의 환호를 등에 업고서야 경기장에 나서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동봉철은 결국 96년 시즌 중반에 해태로 보내졌고, 해태는 역시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는 그를 LG로 보냈다. LG에서 그는 122경기에 나서 2할6푼대 타율에 25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재기하는 듯 했지만, 재발한 부상 탓에 이듬해 봄 한화로,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다시 쌍방울로 내쳐졌다.
 
모두 다른 팀으로만 다섯 팀을 전전한 그의 이름은 당시로서는 최다 이적기록을 세운 선수로 회자되었고(이후 팀 후배 이동수와 최익성이 비슷한 경로로 그의 기록을 깨고 지나가야 했다), 그 사이 재기의 의지조차 말라버린 동봉철은 만 서른이 채 되지 못한 이른 나이에 은퇴를 결심해야만 했다.
 
타의와 환경에 의해 강요당했던 이른 퇴장의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그는 스스로 '인생의 1막은 주연으로 시작해 엑스트라로 내렸지만, 2막은 엑스트라로 시작해 주연으로 내리겠다'는 독한 결의로 인생의 '2막'을 시작했다. 선수출신으로는 예외적인 길이었다.
 
대학 시절 사진을 전공했던 그는 은퇴 후 연예인을 상대하는 스튜디오를 열었고, 내친 김에 연예 매니지먼트 부문까지 영역을 확장해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덕분에 프로팀의 지도자는 아니지만, 연예인팀의 감독으로서 야구장에 돌아올 수 있었고, 해설가로도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말쑥한 모습을 가끔 보여주지 않았다면, 선수 동봉철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그는 꽤나 마음 속 아픈 멍이 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때로 사람들은 야구선수 또한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는다. 그래서 세상 사람 모두가 알만한 업적을 남겨놓지 못했다면 '선수도 아니'라는 철없는 생각도 가끔 한다. 그들 중 누구도 세계 최고의 샐러리맨, 세계 최고의 학생이거나 세계 최고의 주부로서 번듯한 기록 하나 세워놓지 못했음에도, 저마다 글로 풀자면 책 몇 권을 써도 부족할 감동과 희열과 분노를 품은 귀한 삶들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는다.
 
재능이 있었고 열심히 뛰었던, 그러나 그만큼 운과 조건이 따르지 못해 잊혀야 했던 수많은 야구선수들 중에서, 다행스럽게도 단 두 해 동안 보여주었던 너무나도 역동적이고 신선했던 힘에 대한 기억으로 안타깝게나마 떠올릴 수 있는 이름 하나가 바로 동봉철이다.
 
 
 
출처:
http://sports.media.daum.net/nms/baseball/expert/ba_k/list.do?cate=24193&typ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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