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 두 차례 무승부로 유난히 말이 많은 2004 한국시리즈. 그러나 올 시즌 한국시리즈는 길어진 시간 만큼 역대 어느 시리즈보다 흥미를 끌고 있다. 비록 공식 기록으로 남지는 못했지만 배영수의 10이닝 노히트노런 등 팬들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2004 한국시리즈는 무승부에 대한 일부 비난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승의 향방을 쉽게 점칠 수 없는 점이 흥행 요소로 작용해 야구팬들의 관심을 더 고조시키고 있다.

한국프로야구는 지난 82년 첫발을 내딛어 출범 23년째를 맞고 있다. 메이저리그나 일본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지만 그 역사에 비하면 상당한 발전을 이뤄낸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한국 프로야구의 '왕중왕'을 가리며 최고 축제로 자리 잡은 한국시리즈는 그 동안 많은 야구팬들에게 눈물과 환희와 감동을 안겨 주었다.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역대 한국시리즈를 되돌아 본다.

역대 한국시리즈 전적

연도

우승팀

준우승팀

전적

연도

우승팀

준우승팀

전적

1982

OB

삼성

4승1무1패

1994

LG

태평양

4승

1983

해태

MBC청룡

4승1무

1995

OB

롯데

4승3패

1984

롯데

삼성

4승3패

1996

해태

현대

4승2패

1985

삼성(전후기 통합 우승)

1997

해태

LG

4승1패

1986

해태

삼성

4승1패

1998

현대

LG

4승2패

1987

해태

삼성

4승

1999

한화

롯데

4승1패

1988

해태

빙그레

4승2패

2000

현대

두산

4승3패

1989

해태

빙그레

4승1패

2001

두산

삼성

4승2패

1990

LG

삼성

4승

2002

삼성

LG

4승2패

1991

해태

빙그레

4승

2003

현대

SK

4승3패

1992

롯데

빙그레

4승1패

2004

?

?

?

1993

해태

삼성

4승1무2패




 

82년 OB, 원년 첫 챔피언 거머쥐어

'만루 홈런으로 동트고 만루 홈런으로 저물다.'

프로야구 올드 팬들에게는 이 말만큼 가슴 저미는 말이 없다. 82년 원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 연장 10회 말 2사 만루에서 MBC 이종도가 삼성 이선희에게 역전 결승 만루홈런을 뽑아냈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나 신기하게도 이 해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도 만루홈런으로 승부가 갈렸다.

10월 11일, OB(현 두산)와 삼성의 한국시리즈 6차전. OB는 5차전까지 3승 1무 1패로 우승에 한 발짝 다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 날 지면 모든 게 허사인 삼성은 OB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 결과 8회까지 점수는 3-3. 그러나 OB는 9회 말 신경식의 밀어내기 볼넷으로 앞서나갔고 김유동이 이선희에게 굳히기 만루홈런까지 빼내며 원년 우승을 자축했다. 김유동은 초대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불사조'로 불리며 OB를 상징하던 투수 박철순 역시 7차전에서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호투를 펼쳐 팀 우승에 공헌했다. 그러나 팬들의 이목이 가장 집중되는 두 경기에서 만루홈런 두 방을 맞은 삼성의 이선희는 은퇴할 때까지 '비운의 투수'로 불렸다. 이선희는 당시 최고의 좌완으로 명성을 날렸음에도 원년 만루홈런 두 방으로 자신에게 붙은 불명예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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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년 첫 한국시리즈 당시 OB 투수 박철순이 공을 던지고 있다.

84년 최동원의 원맨쇼로 롯데 정상 올라

이제는 전설이 돼버린, 다시는 나오기 힘든 최동원의 원맨쇼가 펼쳐진 1984년 한국시리즈. 최동원은 7차전까지 이어진 롯데와 삼성의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에 출전해 혼자 4승을 챙기며 소속팀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4경기를 완투했다는 사실인데 아무리 투수 분업화가 돼있지 않은 초창기라 하더라도 최동원의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7차전에서 8회 역전 3점 홈런을 뽑아낸 롯데 5번 타자 유두열 역시 화려한 조명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일화가 하나 있다. 경기 전 강병철 감독은 코치에게 타순을 불러주며 명단을 작성하게 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6번에 배치한 유두열이 5번에 있는 것이었다. 강 감독은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결국 유두열은 한 방으로 감독의 믿음에 보답했다.

86년 해태 선수단 버스 방화 사건

1986년 10월 22일 대구 구장 주차장에서는 일어나서는 안될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홈팀 삼성이 라이벌 해태(현 기아)에 역전패를 당하자 흥분한 대구 관중들이 해태 선수단 버스에 방화를 한 것이다. 불은 순식간에 번져 버스 한 대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시위진압부대가 출동하고 나서 밤 11시가 넘어서야 사태가 진정됐다.

이 날 사태에는 청와대까지 개입했는데, 청와대가 "대구구장에서는 경기를 하지 말던가 관중 없이 치러라"고 지시한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경기는 대구에서 계속 열렸지만 이날 관중 난동이 사회에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에도 한동안 해태와 삼성은 팬들뿐 아니라 구단끼리도 편치 않은 관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91년 한순간에 무너진 송진우의 퍼펙트게임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1991년 10월 13일 해태와 빙그레(현 한화)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빙그레 송진우는 눈부신 피칭을 보였다. 해태 강타선을 맞아 빠른 직구와 슬라이더, 정확한 컨트롤을 앞세워 8회 투아웃까지 퍼펙트 행진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포수 유승안과 1루수 강정길의 어정쩡한 포구로 해태 정회열의 손쉬운 타구를 놓치면서 대전구장에는 검은 그림자가 감돌기 시작했다.

정회열이 끝내 볼넷을 골라 나갔고 뒤이은 홍현우는 안타를 뽑아내 송진우의 노히트노런까지 무참히 깨뜨렸다. 송진우는 정신을 가다듬고 투구에 집중했지만 분위기를 탄 해태 타선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장채근은 주자일소 좌중월 2루타로 해태 역전을 이끌었고 윤재호는 우월 3루타로 송진우를 끝내 마운드에서 끌어내렸다. 결국 빙그레는 4전 전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93년 입단 첫해 한국 야구 좌우한 박충식, 양준혁, 이종범

1993년에는 한국시리즈 단골팀 삼성과 해태가 외나무다리에서 맞붙어 해태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삼성을 꺾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 해 최고 화제는 우승팀 해태가 아닌 삼성의 신인 투수 박충식이었다. 박충식은 대구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3차전에 선발 출전해 연장 15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혼자 181구를 던지며 철완 어깨를 과시했다.

이날 삼성과 해태는 2대 2 무승부를 기록하며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박충식은 분명히 '승리 없는 곳의 승자'였다. 특히 박충식이 상대한 투수는 역대 최고 투수로 손꼽히는 선동렬로, 한 신인 투수의 겁 없는 패기에 많은 야구팬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영광의 상처가 너무 컸던 탓인지 박충식은 이후 내리막길을 걸어 안타까움을 남겼다.

해태의 신인 이종범 역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는데 한국시리즈 7차전까지 29타수 9안타 4타점 7도루로 팀의 우승을 견인했다. 비록 신인왕은 삼성의 '괴물타자' 양준혁에게 뺏겼지만 본선 무대에서 맹활약해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이 해 한국시리즈는 양준혁, 박충식, 이종범 같이 신인 같지 않은 신인들로 인해 역대 어느 한국시리즈보다 흥미를 끌었다.

94년 김선진, 끝내기 한 방으로 무명 인생 날려

지금도 LG 팬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1994년 태평양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이다. 당시 LG와 태평양은 이상훈-김홍집 두 좌완이 호투를 거듭하며 명승부를 펼쳤다. 1-1로 양 팀은 연장전에 돌입했고 연장 11회 말 LG는 승부를 결정짓는 한 방을 터트린다. 1사 후 김선진이 김홍집에게 좌월 끝내기 홈런을 뽑아내며 잠실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 것이다.

이 한 방으로 5년간 벤치를 전전하던 김선진은 이름을 날렸다. 상대 에이스 김홍집의 투구가 워낙 뛰어난 데다 한국시리즈 최초의 끝내기 홈런이라는 상징성까지 있었다. 더구나 3만이 넘는 관중이 운집한 대규모 잠실구장에서 나온 끝내기 한 방은 그만큼 짜릿함이 컸다. 그러나 상대 투수 김홍집은 연장 11회까지 141구에 2실점이란 호투에도 패장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96년 정명원의 '전무후무' 노히트노런과 김응룡의 심리전

96년 해태와 현대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현대 선발 정명원은 눈부신 투구를 보인다. 9이닝 동안 29타자를 상대로 무안타 3사구 9탈삼진으로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는 역대 10번째이며 포스트시즌에서는 지금도 깨지지 않는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현대는 정명원의 활약을 앞세워 이대진이 호투한 해태를 4대 0으로 물리치고 4차전을 승리로 장식한다.

그러나 노히트노런의 수모를 당한 해태 김응룡 감독은 경기 후 "현대 연고지인 인천 출신 심판이 의도적으로 현대를 봐주고 있다"며 "또 인천 출신 심판이 나서면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현대는 강력 반발했고 양 팀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그러나 해태는 불리하게 돌아가던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다사 한번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야구계에서는 이를 김응룡 감독의 고도의 심리전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김 감독은 매년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승부처다 싶으면 심판에게 필요 이상의 어필을 하거나 상대 감독을 자극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또 경기 중 선수들의 경기가 마음에 안 들면 덕아웃의 의자를 집어던지거나 문짝을 걷어차는 등 과하게 흥분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때마다 김 감독은 손쉽게 우승을 거머쥐었다.

2002년 7전 8기 삼성 우승의 대역전 드라마

이보다 더 극적일 수 있을까. 지난 2002년 삼성과 LG의 한국시리즈 6차전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삼성은 9회 말까지 LG에 6대 9로 뒤져 승부는 최종전인 7차전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9회 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대타 김재걸의 안타와 브리또의 볼넷으로 만든 1사 1, 2루에서 한국시리즈 들어 단 2안타에 그치던 이승엽이 3점 홈런을 날린 것이다.

그러나 이 날 이승엽은 주연이 아니었다. 곧 이어 등장한 마해영이 바뀐 투수 최원호의 가운데 몰린 직구를 그대로 받아 넘겨 역대 포스트시즌 최종전 첫 끝내기 홈런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대구 구장 가을 하늘에는 폭죽이 연이어 터졌고 삼성 선수들은 저마다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7전 8기만에 이뤄낸 한국시리즈 우승인 만큼 삼성의 감격은 말로 표현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LG 역시 패자는 아니었다. LG는 정규시즌 1위로 여유 있게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삼성과 달리 시즌 막판까지 4강 전쟁을 치르다 1경기를 남겨 놓고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럼에도 3위 현대, 2위 기아를 연파하고 마침내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온 것이다. 바닥난 체력 속에 정신력만으로 우승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 해 LG의 준우승은 김재현의 부상 투혼까지 겹쳐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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