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 삼성 선발투수로 출전했다. 2차전까지 두 팀이 1승1패로 팽팽히 맞서 3차전이 어느 경기보다 중요했다. 당시 삼성 우용득 감독이나 투수코치들이 특별히 요구한 게 있었을지 싶다.
 
=>어떻게든 6, 7회까지 막아달라고 했다. 그러면 삼성에 승산이 있다고 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중간계투, 마무리가 잘 짜여진 상태가 아니라, 여차하면 완투도 각오해야 했다. 코칭스태프는 7회까지 막길 바랐지만 난 처음부터 달랐다.
 
처음부터 달랐다면.
 
=>9회까지 완투할 각오가 돼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이상을 던졌다.
 
=>(숨을 크게 내쉬며) 누가 아닌가. 9회 이후까지 던지리라고는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훗날 몇몇 분들이 “박충식이 야구를 오래 못한 건 그날의 혹사 때문이었다”고 하시던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 경기가 없었으면 날 기억하는 이들도 지금 같지 않았을 거다. 어차피 인생이란 뭔가를 얻기 위해선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지 않나.
 
 
 
 
대통령배 우승으로 당신의 지명도가 급상승했다. 해태에서 가만 둘리 없었을 텐데, 어째서 프로 대신 대학행을 선택했나.
 
=>해태에서 날 지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계약금과 연봉이 높지 않았다. 워낙 해태가 잘 나가던 시절이라, 내가 크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거기다 당시만 해도 프로 신인들은 거의가 대졸선수들이었다. 대학 졸업 뒤 프로무대를 밟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1980년대 후반이면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등 야구명문대학들이 불꽃 튀는 스카우트전을 펼쳤을 때다. 경희대를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나. 그즈음 경희대는 교내 야구장이 없어 고등학교 야구장을 전전했는데.
 
=>왜 그거 있지 않나.
 
‘끼워팔기’ 말인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만 진학한다면 연·고대 입학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학교 입장에선 한명이라도 더 대학 진학을 시켜야했다. 나 역시 의무감이 있었고. 2명을 데려가는 조건으로 경희대에 입학했다. 졸업 때 교사자격증이 나온다는 말에 귀가 솔깃한 것도 있고(웃음).
 
하지만 경희대 진학 뒤 4년간 ‘고무팔’ 박충식을 봤다는 이가 거의 없었다.
 
=>고교 때 잘 나가던 선수들이 어째서 대학만 가면 ‘불운의 투수’로 전락하는지 아는가.
 
대학 체육부의 굴절된 선·후배 문화 탓이 크다는 생각이다.
 
=>맞는 소리다. 여자, 술, 담배는 죄다 대학에서 배운다. 난 당시 이해를 못했다. 광주 촌놈이 서울로 상경할 땐 야구로 멋지게 성공하자는 다짐이 있었을 텐데, 매일 선배들 쫓아다니면서 못 마시는 술을 왜 억지로 마셔야하고, 선배들 뒤치다꺼리를 어째서 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즈음 대학 체육부의 잘못된 선·후배 문화로 많은 대학선수들이 야구부 기숙사를 탈출했다. 당시 그런 선수를 가리켜 ‘빠삐용’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당신은 어땠나.
 
=>이상훈이 ‘고대 빠삐용’이면 난 ‘경희대 빠삐용’이었다. (이)상훈이가 고대 선배들한테 두들겨 맞으면 경희대로 피신했고 내가 맞으면 고대로 넘어갔다(웃음). 그마저도 힘들면 고향으로 도망가곤 했다.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 등 해태 투수 3명을 상대로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특히나 선동열과의 맞대결은 좀체 보기 힘든 명승부였다.
 
=>내 공에 확신이 있었기에 선동열 선배가 아니라 선동열 할아버지가 와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기자들이 맞대결 소감을 물었을 때 비로소 ‘내가 대투수와 접전을 벌였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연장 15회 완투는 감독의 지시였나 혹은 묵인이었나. 그도 아니면 감독의 지시를 당신이 어긴 것이었나.
 
=>이닝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투구내용이 더 좋아졌기에 코칭스태프에서도 바꿀 기회를 놓쳤다. 무엇보다 내가 마운드에서 내려갈 의사가 없었다. 권영호 투수코치가 걱정되니까 “괜찮냐? 어디 아픈데 없냐?”하고 물으면 “코치님, 그런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마십시오. 전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던질 겁니다”하고 짜증을 낼 정도였다. (야구공을 손에 쥐며) 연장 15회 제한이 없었으면 난 20회, 30회도 던졌을 거다.
 
당신이 연장 15회까지 버틸 수 있던 배경은 뭐니뭐니 해도 싱커에 있다고 본다.
 
=>정확한 지적이다. 볼카운트 투스트라이크원볼이나 투스트라이크투볼에서 항상 몸쪽 싱커를 던졌다. 그땐 워낙 공끝이 좋다보니까 헛스윙이거나 쳐도 땅볼이게 마련이었다. 해태 타자들이 싱커만 던지면 깜짝 놀라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얼마나 ‘획’하고 몸쪽으로 꺾였으면 이순철 선배 같은 이는 심판한테 “이게 무슨 스트라이크냐, 당신이 한번 쳐 보라”면서 어필할 정도였다.
 
당신의 싱커는 한국프로야구사에서 최고로 꼽힌다. SK 조웅천, 정대현도 싱커를 던지지 않고 서클체인지업을 던지는데. 두 투수 말로는 “싱커만큼 구사하기 힘든 공도 없다”고 하던데.
 
=>싱커는 프로 들어와 양일환 투수코치에게 배웠다. 엄청난 연습이 필요한 구종이다. 그러나 일단 익히면 땅볼처리로 투구수를 절대적으로 줄일 수 있는 공이다. 현역 시절 정말 고비이거나 쉬고 싶을 때 주로 싱커를 던졌다. 물론 이 때문에 수술대에 더 빨리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2000년 결국 고향팀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감회가 남달랐을 듯싶다.
 
=>해태에서 반드시 재기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해태의 재활시스템은 삼성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어느 정도였나.
 
=>삼성은 선수가 찾기 전에 트레이너가 재활정보를 세세하게 알려줬다. 그러나 해태는 선수 스스로 정보를 구하고 재활도 해야 했다. 게다가 재활이 전적으로 자비로 이뤄졌다. 미국으로 재활을 떠나도 선수가 자기 돈 내서 해야 했다. 더 어처구니가 없던 건.
 
어처구니가 없던 건?
 
=>구장 내 웨이트 트레이닝장이었다. 가뜩이나 구장 후미진 곳에 아무렇게나 지은 웨이트장이었는데 역기에 돌맹이가 걸려 있었다. 믿어지는가? 무슨 프로야구 웨이트장이 동네 약수터도 아니고 제대로 된 트레이닝 기구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해태 트레이너에게 “아니 한국시리즈 우승을 9번이나 했다는 팀의 웨이트장이 이게 뭐냐”고 따졌겠는가(웃음). 지금도 해태 우승은 미스테리다. 그때 이대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재활을 포기했을 거다.
 
 
 
 
당시 해태의 최선참 선수가 선수협에 반대하는 바람에 당신과 대립각을 이룬 것으로 알고 있다.
 
=>(굳은 표정으로) 당시 해태는 선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경직된 선·후배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율적인 의사표현이란 게 존재할 수 없었다. 당시 그 최선참 선수의 말이 곧 선수들 사이에서 법으로 통했다. 구단도 직접적으로 선수들을 관리하는 대신 최선참 선수를 활용했다.
 
양준혁과 최선참 선수 사이에서 입장이 곤란했을 것 같다.
 
=>최선참 선수에게 직언할 이가 나밖에 없었다. 그와 전지훈련장에서 선수협 문제를 놓고 티격태격 싸우기를 반복했다.
 
단순히 선수협 때문에 해태 최선참 선수와 갈등을 빚은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해태식 선·후배 문화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들었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난 룰을 바꾸고 싶었다. 프로에서 강압적인 위계질서는 결국 퇴보를 의미할 뿐이었다. 예를 하나 들겠다. 전지훈련 가서 선수들이 맥주 한두 잔 마시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생각해보라. 성인에 거의가 가정이 있는 가장들 아닌가. 그런데 당시 해태 코칭스태프에선 무조건 밤 11시에 예외 없이 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자란다고 모두 자겠나. 젊은 선수들이 삼삼오오 맥주 한잔 마시러 나간다 치자. 그러다 맥주 마시려고 외출하는 선참 선수들과 마주쳤다 치자. 어차피 서로 맥주 마시러 나가는 길이면 같이 가든가, 선참들이 모른 척 하고 다음날 주의를 주면 좋은데 꼭 새벽에 집합을 시키는 거다.
 
프로야구에서 집합이라, 다른 구단도 많았지만 유독 해태가 심했던 것으로 안다. 해태 신화의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한데.
 
=>집합은 하급 군사문화를 그대로 따라한 형태였다. 새벽 1, 2시 호텔 옥상에 집합할 때까지 코치가 몽둥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선수들이 다 모이면 코치가 최선참 선수의 뺨을 후려 친다. 당연히 최선참 선수가 열이 받지 않겠나. 그럼 자기 바로 밑 후배를 나오라고 해서 배트로 때리는 거다. 그 후배는 다시 바로 밑 후배를 엎드리게 한 뒤 매질을 가하고. 이게 어디 프로야구팀인가, 군대지. 한 번은 집합을 하라는 최선참 선수의 지시를 내가 막은 적이 있다. 정말 답답한 건 그렇게 매질을 당했던 선수들이 선참이 돼서 똑같은 짓을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 삐뚤어진 보상의식을 바로 잡지 않는 이상 팀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2000년 선수협 결성과 해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런 와중에도 재활에 성공해 2001, 2002시즌 중간계투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2002년에는 47⅔이닝을 던져 5승 3패 8세이브 12홀드를 기록하며 해태 투수진의 듬직한 버팀목이 됐다.
 
=>두 시즌 연속 성적이 좋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여러 가지 실망으로 야구에서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그토록 개선하고자 했던 운동 환경이나 룰도 어느 것 하나 변한 게 없었다. 그럴 때면 호주에 있는 아내와 아들 생각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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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기자 기사가 올라왔네요...박동희의 Mr.베이스볼...
호주에서 직접 박충식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 읽으면서 다시한번 짠 해집니다...어흑...


원조삼성
박충식.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억하는 선수죠 2009/02/12


필살졸업머신
해태 선수생활에 대해 불만이 많았나 보네요.
181구 때문에 선수 생명이 단축되었을 것 같지만,
그로 인해 삼성을 대표하는 전설로 자리잡게 된 선수...
그만 생각하면 그저 가슴이 찡해집니다.
2009/02/12


빨강독수리★
뭐 맞았는데 좋은 기억이 있을리가 없겠죠...

코치->고참->중참....이런식으로 내리 구타는 좀 충격적이네요... 완전 군대랑 판박이...

종합해 보면 삼성은 지원이나 이런면은 좋았으나 결국 트레이너 의견 무시하고 굴리다
탈났는데 보상 선수로 그냥 보내버리고...

해태는 그때 해태 말년이라... 시설도 안좋고 구타도 좀 있었고...
2009/02/12


도실선★
181구 완투...머리털이 쭈뼛햇지네요. 기사에서 거론되는 최선참 선수가 누구인가요? 이순철 코치인가요? 궁금하네요 2009/02/12


브렛하트
기사에서 거론되는 최선참 선수는 이호성이죠... 2009/02/12


브렛하트
이순철 코치는 97년말에 해태에서 방출되어서 98년도에는 삼성에서 뛰었죠...삼성에서는 1년만 뛰고 은퇴... 2009/02/12


도실선★
이호성이군요... 2009/02/12


필살졸업머신
가끔 오락실에 보이는 한국프로야구 98이라는 게임에서 2번타자로 나오죠. 이거성...
베이커, 박충식, 전병호, 조계현 등을 골라서 던지곤 했는데...
2009/02/12


원하는건로또대박
양신이 해태로 트레이드 되기 전에 삼성에 이미 공 궤적 분석하는 기계가 있었다더군요

양신 해태 트레이드 후에 그거 없어서 당황했다던데...
2009/02/12


바나나스카이
정말 가슴으로 기억하는 선수입니다 ㅠㅠ 2009/02/12


돌아오라 엄정욱
와.... 간만에 정말 좋은 인터뷰를 봤네요..
단숨에 끝까지 읽어내려 갔습니다.
호주에서 야구와 아무 상관없는 슈퍼마켓 하는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과거 해태 이야기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서도 충격이네요..
돌역기, 새벽집합, 코치의 귀싸대기, 줄빠따.... 어후..
2009/02/12


비룡의꿈
삼성과 해태는 지원이나 시설이 비교자체가 안되었죠.. 그런데 번번히 KS에서 해태에게 미역국을 먹고 말았죠. 2009/02/12


신촌독수리@SC
저의 어린 시절 언더핸드 투구폼으로 임창용의 폼을 따라하기 전까지
박충식의 옆구리 자세를 많이 따라했습니다....

생긴거도 훨친하니 잘 생겼는데...
책임감, 성실함, 진실함이 너무 마음에 드는 선수네요..

야구 교실 채려서 야구 사랑 잘 전수하시길...
2009/02/12


도파민
좋은 기사 써준 박동희 기자님 감사합니다.
정말 보면서 눈물이 찔끔 나는 군요.
2009/02/12


수퍼스타리오스
아... 챙피하다. 해태... 2009/02/12


2002년6차전
우리의 혼 박충식 2009/02/12


93년삼성의추억
박충식..참 아까운 선수입니다. 2009/02/12


수퍼스타리오스
박충식 선수도 혹사만 피했으면 이강철 선수에 필적할 누적기록은 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어깨수술한 뒤 1년만에 플레이오프 엔트리에 불렀다는 삼성 감독이 혹시 그 '서 모' 감독인가요?
2009/02/12


빨강독수리★
저 기사상으로 보면 우용득 감독 같은데요.... 2009/02/12


바나나스카이
서정환감독 맞죠 99년이니깐.. 2009/02/12


빨강독수리★
아 서정환 감독이 맞군요...우용득 감독은 181구때... 2009/02/12


野神☆캐넌★승호
참... 이런 기사때문에 마냥 박동희기자를 미워할수만은 없다는...
삼성도 해태도 너무했네요. 아니... 박충식선수가 너무 순진했을런지도... 하지만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야구를 왜 야구를 보는지 깨닫게 해주시는군요.
2009/02/12


풍산농원
박충식 선수보고 플레이오프까지 몸을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구단 고위관계자가.. 혹시 전모 사장이 아닐까 모르겠내요.. 2009/02/12


Gue...
그때면 전 모 사장 맞을겁니다. 99년 플옵얘기니,
전 모 사장, 서정환 감독.......

정말 가슴 깊이 사랑했던 선수였는데...
좋은 기사 잘 봤습니다~
2009/02/12


Gue...
그나저나 호주에서 야구스쿨 한다는 말은 그냥 그런 풍문이었던 거군요.
(하고 싶다는 거였군요...ㅋ)
한식당, 초밥집이랑 마켓이었군요~
2009/02/12


LG이대형☆마구
프로야구에서 저런 빠따질이라 ;;
무슨 고딩들도 아니고 솔직히 이해가 안가네요 !
인터뷰 깔끔하게 좋네요
2009/02/12


흰머리수리
99년 삼성사장은 전수신사장이죠...삼태 라이거스를 만든 장본인이구요... 2009/02/12


박충식포에버
나의 영원한 히어로... 박충식... ㅜ.ㅜ
한국 잠깐 들어왔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박동희 기자 인터뷰 정말 고맙습니다. ㅜ.ㅜ
2009/02/13


단순곰
저희 동네 사십니다.....얼마전 인사하고 안면 텄습니다...골프치자고 하시는데 워낙 잘 치셔서 감히 못하고 있슴.. 2009/02/13


신촌독수리@SC
예전에 스포츠 조선에서 발행하는 팬가이드북 보면..
박충식 별명이 "라이온킹"으로 나오는데..
저는 이승엽보다 라이온킹 별명이 박충식에게 더 잘 어울리는거 같더라구요... 외모가 딱 사자 느낌..
2009/02/13


브렛하트
박충식도 신인때는 '아기사자'라고 나왔었죠...첫해부터 잘했고, 계속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경력 좀 쌓이니깐 '라이온킹'으로... 이승엽도 마찬가지구요...ㅎㅎㅎㅎ 2009/02/13


하늘색꿈
아~ 정말 가슴이 찡하군요... 전 아직까지도 삼성에서 가장 좋아하는 투수는 박충식입니다!!
보상선수건은 너무 충격을 받아서... 뭐 부상중인 선수를 뽑아가지 않을거라는 생각이었겠지만 해태는 결국 뽑았었죠. 뭐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가슴으로는 절대 용납하지 못했던...
당시 동네야구들은 죄다 박충식폼 따라하고 난리였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2009/02/13


광교산정도령
전수신.. 정말 잊고 싶은 이름입니다. -_- 2009/02/13


광교산정도령
저에겐 김상엽 다음으로 좋아하는 투수였지만..
기사보니 참.. 그래도 실패했다는 얘기 들었었는데.. 멋지게 성공하셨으니 정말 흐믓하고 좋습니다. 양일환 코치에게 배운 싱커.. 오셔서 좀 가르치시지. ㅎㅎ
2009/02/13


Ryu~
아.....박충식.... 2009/02/13


좌조거포우브콜돼
기사 감동적이네요..ㅠㅠㅠ 93년 야구 참 재미있었죠^^;; 제가 야구 입문한 해이기도 하구요..ㅋ 2009/02/13


쿠니미 히로
저번 김상엽선수 인터뷰도 그렇고 이번 박충식선수 인터뷰도 상당히 인상적이네요..다음에는 김성래선수나 강기웅 선수 인터뷰 했으면 좋겠는뎅...93년의 삼성은 정말 매력적이였죠..제가 언급한 4선수다 삼성하고 마무리가 다 좋지 않았네요.. 2009/02/13


베이스™FBLD
아 박동희 기자님 고맙습니다..

박충식.. 이름 하나만으로도 가슴떨리고 눈물이 나려고 하는군요.
2009/02/13


백마
서모감독 그버릇 누구못주죠. 그선택이 결국 선수하나를 망가뜨렸습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그당시 엔트리에 안넣었으면.. 계속 출전안시켰으면..
삼성에서 십년은 더 볼수있는 선수였는데
2009/02/13


★금천구이글스★
가정도 있는 아이 아빠인 선수들인데 집합에 구타라니 -_-;; 2009/02/13


오렌지
15회 연장 혈투는 아직도 생생... 2009/02/13


윤짱
이야,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들의 연속이군요.
대학야구하면서 때리고 프로야구 선수들을 집합 걸어서 때리고, 어깨수술했는데 플레이오프에서 돌리고..
박충식 선수 그래도, 지금 호주에서 잘 살고 계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에휴.
2009/02/13


어익후
박충식...
생각할수록 아깝고, 가슴아프고, 눈물이 나려고 하는 선수...

그리고..참..
해태의 조직문화는 팬으로서도 할말이 없네요..
2009/02/13


징글벨™FBLD
최선참에게 싸대기를 날리고 그 다음 줄빠따...
90년대 후반에 저런 모습이었다니 당시 해태가기 싫다고 은퇴불사했던 선수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2009/02/13


하이쭈
지금은 두산골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야구를보던 여고시절 무작정 "박충식때문에" 삼성을 좋아했던 시절이있었습니다.
그땐 야구를 보는게아니라 선수를 봤었죠.. ㅎㅎㅎ
암튼.. 이유야 어쨌던간에 저에게 야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준 멋진 선수죠..
호주에서 슈퍼마켓을 하고있다는건 정말 의외네요..
정말 훌륭하고 멋진 선수였습니다. ㅎㅎ
2009/02/13


슈퍼스타엠디
양준혁이 1년만에 해태에서 트레이드된것도
해태 팀내 분위기 때문이었을겁니다.
아마 고참들한테 고분고분하지 않았을거고
S급 선수보다 팀을 선택한 구단이 그런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트레이드를 했겠죠
(뭐 돈도 필요했겠지만)
2009/02/13


벨트란™FBLD
해태는 정말 저때는...프로야구에서 저게 뭥미-_-;;; 2009/02/13


확인불가
보다 보니 눈물이 찔끔 나네요. 2009/02/13


야구,여행,책♪
해태 얘기는 참... 할 말이 없군요... 무슨 프로팀이... -_-);; 2009/02/13


NO.35창용
간만에 좋은기사.. 2009/02/13


신인투수
15회 완투는 타팀팬이 봐도 명승부였죠.
덕분에 마구마구 선발 한자리도 박충식 선수입니다.

앞으로도 꼭 꿈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ㅊㅊ~
2009/02/13


흰머리수리
박충식의 단명이 93년 포스트시즌 때의 무리한 혹사(플옵 3차전 9회 완투 => 이틀 쉬고 5차전 6이닝 경기 중무리 => 5일 쉬고 3차전 15이닝 181구 투구 => 4일 쉬고 선발 등판 4.2이닝 투구)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때의 혹사가 이후의 선수생활이나 어깨부상에 큰 영향을 미쳤죠...94년부터 96년까지는 선발로 뛰다가도 중간, 마무리 노예생활을 했고...98년에도 어깨근육이 찢어진 가운데도 선발로 10승 이상 올렸고, 플레이오프에도 출전했죠...99년 플옵 1차전에 나왔을 때도 너무 빨리 나온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 이때 팔꿈치가 탈이 났다는 기사가 플옵 끝나고서야 나왔죠...
효율적인 투수운용과는 거리가 먼 백인천-서정환 감독 밑에서 야구한게 박충식이 단명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죠...해태타이거즈 부분은 정말 할말이 없을 정도로 저 팀이 V9를 이룬 명문구단인가 할 정도네요...
2009/02/13


흰머리수리
그나저나 구단에서 선수들 관리하느라고 이용한 해태의 역대 군기반장(김일권, 이순철, 이호성)들의 뒷끝이 좋지 못했네요...하나같이 구단과 갈등을 빚은 끝에 트레이드(김일권, 이순철)되고, 강제은퇴(이호성)당했죠... 2009/02/13


레모나
90년대 중반엔 국내감독중에 백감독처럼 안한 감독이 이광환 감독정도 뿐이었으니까..시대가 다르니 뭐라고 할 수는 없죠..개인적으로 서정환 감독이 아쉬운건 그래도 초창기 1세대가 아닌 다음세대 감독이었기 때문에..좀 나아져야 했다고 생각하는거고..선수들을 많이 생각해주는 정동진 감독조차 김상엽은 엄청 굴렸으니까..태평양에 가신 이후론 정민태를 보호하고 투수보호에 한결 더 신경을 쓰셨지만 시대의 흐름이 그랬죠.. 2009/02/13


레모나
언제고 한번은 술먹어보고 싶은 사람 박충식..ㅎㅎ 언제고 호주에 갈 기회가 생기면 꼭 찾아가봐야겠군요. 2009/02/13


아구팬
에휴..93년 엘지와의 플옵5차전 이기고 인터뷰에서 "한국시리즈 해태하고 하는데, 자신 있습니다!" 이 말이 아직도 생생한데..시간은 많이도 흘렀네요..93년에 우승을 했어애 하는데...두고두고 아쉬운 시리즈였습니다. 2009/02/13


野神☆캐넌★승호
감독이전에 삼성구단 고위층에서 강요한 문제이니 어쩔수없죠. 200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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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네이버에 박충식선수 관련 기사가 올라왔다.. ==> 여기
93년도 한국시리즈는 3차전은 나한테도 매우 생생한데..
연장전이 진행될수록 지치기는 커녕 신들린듯한 투구..
정말 문자 그대로 신이 들린듯 했다..

그리고 박충식선수의 은퇴를 결정적으로 앞당긴것은..
93년 연장 15회 완투에 대한 후유증이 아니라..
99년 수술 직후 무리한 등판이라는것이 기사에 나오는군..~
아.. 그 당시 서모감독만 생각하면 정말 열받는구만..~

그리고.. 정말이지 이해할수 없는 삼성라이온즈 구단..
박충식 선수를 비롯하여.. 김상엽 강기웅 이만수 장효조 김시진 등등..
라이온즈 팬들에게 남은 아픈 기억이라고 하겠다..


위의 글은 파울볼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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