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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융~!
아직도 삼성 올드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이름으로
프로야구 초창기에 국내에 들어왔던 재일동포 선수 중,
실력과 매너 면에서 단연 최고의 선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린 시절 스포츠뉴스를 통해 본 그의 첫 모습...
긴 바바리코트를 입고 공항을 빠져 나오는 모습이 어찌나 근사하던지
운동선수라기보다 영화배우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생생하군요.
 
프로원년... 삼미의 처절한 몰락과 해태의 선수 부족은
재일동포 선수에 대한 문호개방을 앞당기는 단초가 됐고,
83 시즌에 장명부가 보여준 괴력은 각 구단이 재일동포 선수 영입에 앞장서는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김일융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죠.
여타 재일동포 선수들이 선수생활의 황혼기에 선수생명 연장을 위해 국내를 찾은 것과는 달리
김일융은 당시에도 요미우리 불펜의 주력투수로 활약하던 거물급 투수였습니다.
13년간 주로 구원투수로 뛰며 통산4백게임에 출전,
80승72패36세이브 방어율 3.16

(1년 먼저 입단한 장명부는 13년간 통산 3백39게임에서91승 84패 9세어브 3?68)을 기록한 그는,
방어율왕에 두차례, 승률왕에 한차례 올랐고 78년엔 구원왕 타이틀도 거머쥡니다.
또한 팀을 두 (76,77) 시즌 연이어 일본 시리즈에 진출시켰으며
76년부터 4시즌 연속 올스타에 뽑히기도 하는 등,
일본 프로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죠.

김일융은 일본 프로입단 당시부터 많은 화제를 뿌렸는데...
그 유명한 고시엔 대회 준우승을 이룬 투수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한국 국적이란 이유로 드래프트에서 제외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의 주가를 상승케 했고 요미우리가 거액에 스카웃 합니다.
결국 이 일은 일본 프로야구의 드래프트제 규정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고 하니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거물이었단 생각이 드는군요.

이보다 1년 먼저 연습생으로 요미우리에 입단한 경력의 장명부가
83년.최하위 삼미를 일거에 정상권으로 도약시킨 전례가 있었기에
김일융에 대한 기대는 그만큼 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투타에서 최강의 라인업을 보유한 삼성에
김일융마저 가세하면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올까를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다른 팀들의 한숨은 늘어만 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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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일융의 영입은 OB가 먼저 시작했다고 합니다.
출범 전부터 구단 측과 협상이 시도됐었는데 삼성이 막강한 추진력으로 가로챈(?)셈이죠.
최고액을 내건 삼성과 OB의 쟁탈전 외에 요미우리에서도 놓아줄 수 없다고 버텨
한때 그의 고국행은 물거품이 되는가 싶었지만 현해탄을 넘나드는 스카우트전은
결국 삼성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여기에는 삼성 이건희 회장과 나가시마 감독의 친분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는 후문입니다.
역시 삼성의 정보력과 스카우트력은 이때부터 타 팀을 압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한국 고향이 경북 상주라니 결국 고향팀을 택한 셈이죠)

당시 김일융의 몸값은 이적료 포함 2억. 여기에 아파트와 차량까지...
연봉과 계약금총액에서도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고액으로,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액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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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한.일 프로야구계의 지대한 관심 속에 국내 무대를 밟은 김일융은
삼미와의 84시즌 개막전에서 첫 선을 보이지만, 이른바 거물 투수들이 겪는
<데뷔전 징크스>를 피해가지 못합니다. 김시진, 양일환의 뒤를 이어 마무리로 투입됐지만
금광옥에게 동점 3점포를 얻어맞고 김시진의 승리를 날려보내고 말죠.
결국 승리투수는 됐지만 스타일은 구긴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연승가도를 달리며 삼성의 "희망"으로 자리잡은 김일융은
김시진과 리그 최강의 좌,우 원투펀치를 이루며 명불허전의 위용을 뽐냅니다.
(개인적으론 역대 최강의 원투펀치가 아닌가 합니다)

김일융은 데뷔해인 84년 16승. 더구나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도맡으며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하고 맙니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운명의 한국시리즈 7차전.
거듭된 역투에 지친 34세의 노장은 투혼을 불살랐지만

8회 유두열과의 대결에서 1-1이후의 통한의 일구가 천추의 한을 남긴 실투가 되고말았습니다.
코칭스테프가, 이미 힘이 떨어져 벤치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게 패인이었죠.
공교롭게도 롯데 역시 최동원 홀로 4승을 거둬 그의 시리즈 3승 마저 역사 속으로 묻히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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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듬해인 85년, 25승을 거두며 삼성의 천하통일에 단단히 일조 합니다.
"팀의 우승을 위해 희생할 뿐, 개인성적은 중요치 않다"
며 입국 기자회견장에서 토해낸 사자후를 마침내 이루어낸거죠.
이 때 김시진 역시 25승을 거두며 역대 최강의 쌍두마차임을 만천하에 확인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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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국내에서의 마지막 시즌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여전히 위력적인 투구로 다승 1위를 질주하던 그는, 전기리그 막판 신병치료를 위해 도일.
"당뇨병"이란 진단과 "절대 안정 "의 처방을 받게 되는데 이를 숨기고 2개월여만에 복귀.
남 몰래 주사를 맞아가며 등판하는 투혼을 보여줬습니다.

그는 일본 무대에 복귀해서도 이 사실을 숨기고 선수생활을 계속했는데 이 사실은 은퇴 후 그가 당뇨병에 관한 책을 출판하면서 알려지게 됩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그의 지나치게 헬쓱한 모습을 떠올릴수가 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던거죠.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13승을 올린 김일융은 포스트시즌에서도 투혼을 발휘, 3승을 거두지만 부상으로 체력이 바닥난 그를 자주 등판시킬 수 없었던 삼성으로선또 다시 정상 문턱에서 좌절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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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시즌을 마친 그는, 3년간의 한국 생활을 접고 일본행을 선언합니다.
그의 일본행은 일본 야구에의 재도전과 자녀 교육문제가 표면적인 원인이었지만,
내성적인 성격으로 말도 통하지않는 고국생활에서 오는 외로움이
상당부분 영향을 미친게 아닌가 싶습니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잠들기 전에 마시는 와인이 5병을 넘기기가 예사였다고 하니
가뜩이나 병마와 싸우고 있던 그의 심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이 고국이지 한국에는 과거 친선경기를 위해 한차례 방문한게 고작이라니
용병이나 다름 없었던거죠. (당시 재일동포 선수들의 공통된 애환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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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으로 돌아가며 "한국에서 야구하는 법을 배웠다"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는 삼진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맞혀 잡는 요령을 터득했다는 의미로,
실제 국내에서의 한해 평균 탈삼진 개수가 100개를 조금 넘었던 걸로 봐서
그가 얼마나 요령 있는 피칭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체력을 세이브 하는 효과도 상당 했겠구요. 구원 전문이던 그가 국내에서 완투형 투수로 변신하는데 필수였죠)

무엇보다 그의 일본 재진출은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역수출"이라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그의 활약에 고무된 일본 프로야구에서 노장인 그를 다시 데려가기 위해
스카우트전을 벌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거죠.

그 중에서도 전 소속팀 요미우리와 다이요가 가장 적극적으로 매달렸고
결국 삼성은 그를 다이요로 현금 트레이드 합니다. 이 때, 삼성은 거액의 트레이드 머니
(액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를 데려올 때 투자한 금액을 상회하는 걸로 기억합니다)
를 받아 타 구단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김일융 역시 노장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 복귀 첫 해 통산 다섯 번째로 올스타전에 출전하고
두자리 승수(11승 12패)를 올리며 센트럴리그 "컴백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하지만 이후 야쿠르트를 거쳐 92년 은퇴할 때까지 당뇨병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고
이를 숨긴 채 마운드에 계속 섰다고 하니 그 놀라운 정신력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황금 박쥐> <밤의 신사> <황금의 왼팔>~!

야간 경기에 유난히 강하고 훤칠한 키에 세련된 외모, 매너를 두루 갖춘
(잘 생긴 외모로 일본에서부터 여성팬이 많은걸로도 유명했죠)
김일융을 대표하던 이 닉네임에서도 알 수 있듯,
3년간의 한국 생활 동안 그는 실력 외적으로도 인정받았습니다.

일본 최고의 인기 구단인 요미우리에서 주축 투수로 활약한 그였지만
깨끗한 매너와 겸손한 자세로 팀 동료는 물론 야구 관계자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고,
특히 프로선수가 가져야 할 몸가짐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아직은 프로의식이 희박하던 선수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됐습니다.
희대의 말썽꾼 장명부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죠.

김일융은 국내 선수 중, 특히 장효조와 깊은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이들의 우정은 각별히 이어진 걸로 유명하죠.
그가 마지막으로 뛴 86년. 삼성엔 성 준 이라는 특급 신인이 입단했고 권영호까지 있었으니...
꽤 오랜 시간 좌완 부재에 시달렸던 요즘을 생각하면
그 땐 정말 좌완 황금기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지난해...
일본 후지 TV에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던 그가
인스트럭터로 롯데 투수들을 지도한다는 너무도 반가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국내무대에서 지도자로 활약하는 그의 모습을 기대해 봅니다.
그때도 삼성 유니폼을 입고 있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죠.^^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에...재일동포 선수를 용병의 범주에 넣는다면 김일융은
역대 삼성의...아니, 모든 용병 중 최고의 투수였음이 분명합니다.
떠나는 뒷모습까지 멋있었으니 금상첨화였죠.
앞으로도 삼성 마운드에 그와 같은 좌완 에이스가 다시 한번 출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첫 번째 <인물열전>...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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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orts.media.daum.net/nms/baseball/expert/ba_k/view.do?cate=24193&type=c&newsid=209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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