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연타석 홈런의 천재 2루수 '강기웅'

[오마이뉴스 2006-10-1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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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25일. 제일은행과의 실업야구 경기에서 한국화장품의 강기웅이 네 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이미 경기는 한국화장품 쪽으로 크게 기울어 있었음에도 관중들이 숨죽이고 그 순간에 집중했던 이유는 사이클링 히트라는 진기록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직접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전 타석까지 강기웅은 단타, 2루타, 홈런을 때렸기에 쉽지 않은 일이지만 3루타를 쳐낸다면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미 87년 대졸 최고 신인으로 꼽히면서도 88 올림픽을 위해 프로 진출을 유보한 강기웅에게 실업무대는 너무 좁았다. (당시에는 올림픽에 프로선수의 출전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대표팀 주축선수들은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아마추어팀인 실업팀에 소속되어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해 같은 이유로 실업무대에 잔류했던 노찬엽, 송진우, 강영수 등이 프로출범 이후 가장 풍성한 실업 선수진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강기웅은 그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가 머물렀던 두 해 동안 실업무대의 홈런, 타점, 도루 세 개의 타이틀은 모두 강기웅의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장타력과 빠른 발을 겸비한 선수였기에 3루타를 만들어낼 능력은 충분했다. 더구나 이미 그 해 봄, 상업은행과의 경기에서 세계 최초 5연타석 홈런을 날려 해외토픽에 올랐던 그였기에 사이클링히트 정도는 무리한 기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마지막 네 번째 타석에서 관중들이 목격한 것은 환호할 수도, 아쉬워할 수도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네 번째 타석에서 때린 공은 역시나 기대대로 외야 깊숙한 쪽으로 쭉쭉 뻗었고 강기웅은 그 빠른 발로 지체 없이 다이아몬드를 내달렸다. 이제 공이 그라운드 어느 구석에건 떨어져주기만 하면 3루타는 충분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힘이 실린 공은 그만 펜스를 넘어가 버렸고 외야심의 손은 머리 위로 빙빙 돌았다. 홈런이었다. 관중들은 홈런포에 환호해야 할지 사이클링 히트의 무산에 아쉬워해야 할지 몰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건은 그게 시작이었다. 강기웅은 다들 똑똑히 보라는 듯 홈플레이트를 밟지 않았다.

만일 홈플레이트를 밟지 않은 것이 인정된다면 강기웅은 '누의 공과'로 아웃 처리될 것이고 홈런은 3루타로 바뀌어 기록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진작에 갈린 승부 때문이었겠지만 아웃카운트를 하나 안고서라도 홈런을 3루타로 바꾸어 사이클링히트를 완성하고 싶었던 강기웅의 '잔머리'였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단순하게 끝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패전에 상심하던 제일은행은 사이클링히트라는 진기록의 제물까지 되고 싶지 않았는지 세상 사람이 다 목격한 그 광경을 외면하고 말았다. 한 점 더 주고 지나, 두 점 더 주고 지나 마찬가지라면 사이클링 히트라도 주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다급해진 한국화장품의 김병일 감독이 거꾸로 나와서 아웃이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주심 역시 기록을 만들어내려는 꼼수가 괘씸했는지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강기웅의 엽기적인 자살행각은 무위로 돌아갔고 비원의 3루타는 결국 홈런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물론 기록을 만들기 위한 장난질은 욕을 먹을 일이다. 그러나 그 날의 해프닝은 강기웅이라는 존재가 야구장에서 얼마나 빛나는 이름이었는지를 돌아보기에 적절한 한 단면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89년 삼성 라이온즈는 불세출의 타격왕 장효조를 내보내는 모험을 감행했다. 장효조는 7년 연속 3할대 타율에 4번이나 타격왕에 올랐던 타격의 달인으로서, 특히 '호타 준족 좌타자'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지금껏 이정훈, 이병규, 봉중근에 이르기까지 발빠른 왼손 강타자에게 붙은 '제2의 장효조'라는 별명은 투수 유망주에게 붙곤 하는 '제2의 선동렬' 만큼이나 영광스러운 꼬리표가 되고 있다.

그런 장효조가 빠진 공백이 크지 않을 팀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러나 복잡한 사연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삼성이 그런 대들보를 내보낼 수 있었던 자신감은 바로 강기웅의 등장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강기웅은 장효조를 대체할 수 있으리라 믿은 신인인 셈인데 그렇게 스쳐지나간 선배의 이름은 그대로 강기웅의 별명으로 남아 사람들은 '오른손 장효조'라고 불렀다.

강기웅은 89년 시즌 데뷔와 동시에 3할 2푼 2리의 타율에 26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이름값을 해냈다. 재일교포 타자 고원부에 5리차로 타격왕을 빼앗기고 태평양 투수 박정현의 19승에 밀려 신인왕도 놓쳐야 했지만 강기웅이 장효조의 전설을 이어가리라는 데 이견은 많지 않았다.

강기웅의 진가는 공격보다는 수비에서 더 잘 드러났는지도 모른다. 그의 내야수비는 화려하면서도 실책이 적었기에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묘기를 흔히 선사했다. '팬과 감독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수비'라는 말은 아마도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흔히 강기웅을 비롯해 박정태, 김성래, 정구선 등이 각축을 벌일 '역대 최고의 2루수'와 김재박, 유중일, 이종범 등이 맞설 '역대 최고의 유격수'는 야구팬들 사이에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논쟁거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유격수와 2루수의 연계플레이)'를 꼽는다면 개인 취향과 선호를 떠나서 '강기웅-유중일'에 동의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수비수 중 가장 긴밀한 호흡으로 공동작업을 벌이는 2루수와 유격수 포지션에서 국가대표 시절부터 손발을 맞춰온 그들은 그야말로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전성기 한 시즌에 그들이 기록했던 실책이 합쳐서 10개에 못 미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다른 팀 주전 키스톤 콤비의 실책 수는 그 대여섯 배가 쉽게 넘곤 했다. 2루수 우측이나 유격수 좌측 깊숙한 타구를 아슬아슬하게 걷어 올린 것만 해도 대단하다 싶은 순간 객석의 눈보다 한 호흡 빠르게 이어져 순식간에 병살을 잡아내는 송구의 릴레이는 마치 NBA의 수준 높은 골밑 삼각패스를 보는 듯한 리듬감을 불러내곤 했다.

그렇게 공격과 수비, 장타력과 주루능력을 두루 갖춘 그에게 '야구천재'라는 별명도 과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다소 부진했던 2년차 시절을 지나 91년부터 93년까지 3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할 때만 해도 강기웅은 조금씩이나마 타격면에서도 장효조가 걸었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몇 시즌을 더 활약해줄 수 있었다면 강기웅의 이름은 장효조보다 앞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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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기웅은 천재소리를 듣는 운동선수들이 흔히 그렇듯 체력 면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흔히 야구선수는 동계훈련 때 쌓은 힘으로 한 시즌을 버틴다고들 한다. 그러나 강기웅은 동계훈련을 일정대로 뛰다가는 시즌에 들어갈 힘마저 소진되어버리는 선수였다.

그것은 그저 다른 야구선수들에 대한 공정함을 잃지 않기 위한 하늘의 배려였을 수도 있고, 일찍부터 꽃을 피운 재능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기초체력의 필요성에 둔감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뒤늦게 한두 해 체력보강으로 해결할 수없는 지경이었기에 코칭스태프도 별 수 없이 동계훈련 열외선수로 찍어놓을 수밖에 없었고, 강기웅은 간신히 겨우내 '요양'하면서 쌓아둔 체력과 타고난 감각을 밑천삼아 한 시즌, 한 시즌을 버텨냈다.

그러나 체력부족이 가져오는 문제는 단순히 피곤함에서 오는 경기력 저하만이 아니다. 피곤한 몸은 훨씬 쉽고 깊게 부상의 위험에 노출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강기웅은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살았고, 95년에는 수비 중에 신인 1루수 이승엽과 충돌하면서 발목에 깊은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 부상에 말 그대로 발목을 잡힌 강기웅은, 96년 고작 11경기밖에 나서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95년부터 96년까지 라이온즈의 지휘봉을 잡은 백인천 감독은 '선수진의 과감한 재구성'으로 유명했다. 그 사이 백인천 감독은 김한수, 최익성, 정경배, 신동주, 이동수 같은 신인들로 타선을 재정비했고 그 선수들은 이정훈, 이강돈, 장종훈이 이끌던 90년대 초반의 빙그레 이글스에 비견되는 역사상 최고의 역동적인 타선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재구성에 아쉬움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강기웅의 트레이드였다.

강기웅은 96년 시즌 후 신생팀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절대 상부상조의 거래가 가능하지 않을 거라던 재계 라이벌팀과의 트레이드였고, 이희성과 최광훈이라는 무명 선수와의 교환조건이었다. (물론 이희성은 약체 태평양 돌핀스에서 '알토란같은' 활약을 펼친 핵심선수였다. 그러나 역시 강기웅에 비교해 논할 바는 아니다.) 비록 3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는 '인간 종합병원'이었지만, 강기웅으로서는 야구인생에서 처음 겪는 황당한 푸대접이었을 것이다.

결국 강기웅은 미련 없이 옷을 벗어버리고 말았다. 현대 유니폼을 입고는 단 한 경기도 뛰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대학 동기들보다 2년 늦게 뛰어든 프로무대에서 불과 8시즌을 보낸 뒤였다.

나중에 들리는 바로는 그 때 마침 장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장인 소유의 종합병원을 물려받아 경영해야만 하는 상황에 닥치고 있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역시 어릴 적부터 잔뼈를 키워온 대구팀에서 뼈를 묻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야구천재의 자존심에 너무 깊은 상처를 강요받지만 않았다면 그의 야구인생이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역대 최고의 2루수' 논쟁에서 강기웅으로 결론이 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물론 그의 경쟁자들 중 누군가가 야구실력 면에서 강기웅을 넘어서기 때문은 아니다. 박정태가, 김성래가, 그리고 멀리는 김인식이 그랬듯, 강기웅의 8년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투혼과 근성으로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만들어낸 스타들이 즐비한 곳이 2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논쟁은 '단순히 전성기의 능력치로만 보자면 강기웅이겠지만…'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더 길고 깊게 인상을 남긴 선배 혹은 후배를 꼽으며 마무리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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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타자의 손에 들린 방망이는 검객이 움켜진 검에 비유된다. 회심의 일격으로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한 방의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강기웅의 손에 들리면 그것은 검이 아니라 곡예사 손에 들린 마술봉처럼 느껴지곤 했다. 혹은 흥이 오른 록커가 훑어대는 기타 같기도 했다. 그렇게 그라운드 안에서 오직 그만이 내뿜었던 여유와 멋은 승부를 가르는 거친 숨결이 엉키고 부딪히는 그라운드 안에서 묘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곤 했다.

타석에서건, 수비위치에서건, 혹은 주자로서 누상에서건, 그라운드 위에 있을 때면 언제라도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집중하게 한 선수. 그리고 비록 거친 힘과 근성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야구라는 운동을 한없이 섬세하고 우아하게 만들어 보여주었던 선수, 강기웅.

그래서 어떤 기준으로든 그를 '최고의 선수'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볼 때마다 항상 반짝거리며 가슴을 청량하게 하는 선수임은 틀림이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야구사를 풍성하게 했던, 또 하나의 기억해야 할 얼굴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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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드에 반발하여 현대에선 단 한게임도 뛰지않고 과감히 은퇴해버린 선수..
비록 짧은 선수생활이었지만 그의 화려했던 플레이는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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